안녕하세요?
5학년 1반 학급홈페이지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1년 동안 동학, 민경, 승현, 종수, 윤서, 승진, 장율, 혜인, 태겸, 가희, 시온, 은중, 정연, 푸름, 수미, 지원, 수연, 나영 18명 학생이 생활합니다.
부족한 것이 많지만 아이들의 성장하는 모습을 애정 어린 눈빛으로 지켜봐 주십시오.
감사합니다.
창덕궁 조사 자료 다 쓰기힘들어서 올림!!!!!!!!!!!!! |
|||||
---|---|---|---|---|---|
이름 | 신승진 | 등록일 | 16.11.23 | 조회수 | 60 |
개설 사적 제122호. 창덕궁은 1405년 태종 때 건립된 조선왕조의 왕궁이다. 처음에는 법궁(法宮)인 경복궁에 이어 이궁(離宮)으로 창건되었지만, 이후 임금들이 창덕궁에 머무는 것을 선호해왔고 특히 임진왜란 이후 법궁인 경복궁이 복구되지 못하면서 창덕궁은 고종 때까지 법궁의 기능을 하였다. 이처럼 오랜 기간 동안 지속적으로 사용되면서 다양하고 복잡한 왕실 생활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에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조선의 태조 이성계는 수도를 한양으로 정하고 경복궁을 창건했지만 제2대 정종은 옛 도성인 개성으로 다시 수도를 옮겼다. 제3대 태종은 개성에 남으려는 대신들의 반대 의견을 무릅쓰고 1404년(태종 4) 다시 한양 천도를 결정하였다. 이 때 경복궁이 존재하고 있었지만 새로 창덕궁을 건설하고자 하였다. 이는 경복궁에서 있었던 정치적 사건에 대해 태종이 꺼려한 이유가 컸지만, 두 개의 궁궐을 동시에 운영하는 양궐체제가 성립하는 계기가 되었다. 1405년 10월에 공사가 끝났으며, 10월 25일 창덕궁으로 이름 붙였다. 이 때 완성된 창덕궁의 규모는 외전 74칸, 내전 118칸이었다. 임진왜란 중 소실된 궁궐들 중 제일 먼저 복구를 시작한 것은 창덕궁이었다. 창덕궁이 먼저 복구된 까닭은 그전까지 임금들이 주로 거처하던 곳이 창덕궁이었으며, 경복궁은 풍수지리상 불길하다는 의견이 가세되었기 때문이다. 창덕궁 복구 공사는 선조 말에서 광해군 초까지 이루어졌다. 그러나 중건하고 약 10년 후 1623년 인조반정 때 외전 일부를 제외한 대부분의 전각이 소실되고 말았다. 이후 25년간 방치되었다가 1647년에 복구되었다. 내용 이후 효종대에는 대비를 위해 수정당, 만수전 등이 건축되었고, 현종대에는 집상전이 건축되었다. 숙종대에는 제정각을 건축해서 각종 천문기기를 설치했고, 청심정, 영타정, 사정기비각, 능허정, 애련정 등을 지으면서 후원을 본격적으로 꾸몄다. 정조는 학문을 중심에 둔 정치를 구현하기 위해 각종 시설을 건축했다. 규장각을 중심으로 봉모당, 개유와, 열고관, 서고, 서향각 등을 세워 역대 임금의 자료와 새로 구입한 도서류를 보관하고 연구할 수 있도록 했다. 또 세자를 위한 공간도 크게 확장했다. 중희당과 수강재가 대표적이다. 그러나 1803년(순조 3) 12월 선정전 행각에서 시작된 화재가 인정전을 비롯한 내전의 상당 부분을 불태웠고, 곧 재건공사가 시작되었다. 창덕궁의 마지막 대화재는 1917년 11월에 일어났다. 대조전 서쪽 행각의 온돌에서 시작된 화재는 내전 영역 대부분을 불태웠다. 복구공사는 경복궁의 강녕전과 교태전 등의 전각을 이건하는 것으로 주요 부분을 충당했다. 이때의 재건공사는 창덕궁의 원래 모습을 크게 바꾸어 놓았다. 또 자동차 차고와 전등, 탁자, 의자, 커튼 등 근대식 설비와 가구의 도입도 건축의 면모를 바꾸는데 일조했다. 대한제국의 황실 가족들은 창덕궁의 낙선재 영역에서 마지막까지 거주했다. 의의와 평가 창덕궁은 인위적인 구조를 따르지 않고 주변 지형과 조화를 이루도록 자연스럽게 건축하여 가장 한국적인 궁궐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왕가의 생활에 편리하면서도 친근감을 주는 창덕궁의 공간 구성은 경희궁이나 경운궁 등 다른 궁궐의 건축에도 영향을 주었다. 궁의 동쪽에 세워진 창경궁과 경계 없이 사용되었으며, 두 궁궐을 ‘동궐’이라는 별칭으로 불렀다. 창덕궁 창덕궁은 조선 시대에 역대 임금이 살며 나라를 다스리던 궁궐의 하나이다. 서울 종로구 와룡동에 있으며, 북쪽으로 이어져 있는 후원인 비원까지 합해서 사적 제122호로 지정되어 있는 중요 문화재이다. 태종 초에 별궁으로 지었는데 계속하여 궐내에 정전인 인정전을 비롯하여, 선정전 · 소덕전 등 여러 전각과 돈화문을 세워 본궁같이 사용하게 되었다. 1592년에 일어난 임진왜란 때에 다른 궁과 함께 거의 불타 버리고 말았다. 창덕궁 1608년에 왕이 된 광해군은 1615년에 불타 버린 경복궁 대신에 창덕궁을 다시 지어 여기에 머물렀다. 이 때부터 1868년에 대원군이 경복궁을 재건할 때까지 창덕궁은 정궁 구실을 하였다. 광해군 때 다시 지어진 궁도 인조 반정과 몇 차례의 화재로 헐고 다시 짓는 등 많은 변화를 거쳤지만 비교적 잘 보존되었다. 정전인 인정전과 그 주위의 전각, 그리고 대조전을 중심으로 한 내전, 후원으로 구성되었으며, 낙선재 등 중요한 전각이 많이 남아 있다. 특히 비원은 우리 나라의 유일한 궁궐 후원이라는 점과 우리 나라의 정원을 대표한다는 점에서 가치가 높다. 1912년부터는 후원인 비원과 함께 인정전을 관람할 수 있게 하였고, 광복 후에는 창덕궁과 후원을 공개하고 있다. |
이전글 | 종묘에 대하여 |
---|---|
다음글 | 정보기기의종류나기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