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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족한 것이 많지만 아이들의 성장하는 모습을 애정 어린 눈빛으로 지켜봐 주십시오.
감사합니다.
이순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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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이정연 | 등록일 | 17.02.15 | 조회수 | 66 |
조선 중기의 장군으로 임진왜란 당시 혁혁한 전공을 세웠던 이순신(1545~1598)은 서울 건천동에서 출생했다. 본관은 덕수(德水)이며, 자는 여해(汝諧)이다. 아버지는 이정(李貞)이다. 조선 초기에는 가문의 선조들 중에 고위관직을 지낸 인물들이 있었다. 5대조 이변(李邊)은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와 홍문관 대제학을 지냈고, 증조부 이거(李琚)는 병조참의를 역임했다.
28세가 되어 훈련원별과(訓鍊院別科)에 응시하였으나 달리던 말이 넘어져서 왼쪽 다리를 다치게 되었다. 아픔을 참고 끝까지 시험을 마쳤지만 탈락했다. 4년 후인 1576년(선조 9) 식년무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권지훈련원봉사(權知訓鍊院奉事)로 임명되어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이어 함경도의 동구비보권관(董仇非堡權管)에 보직되고, 이듬해에 발포수군만호(鉢浦水軍萬戶), 1583년(선조 16) 건원보권관(乾原堡權管) · 훈련원참군(訓鍊院參軍) 등을 역임했다. 1586년에는 사복시주부가 되었다. 이후 조산보만호 겸 녹도둔전사의(造山堡萬戶兼鹿島屯田事宜)가 되었다. 당시 이순신은 여진 세력의 침입을 적절하게 방어하지 못한 것 등이 문제가 되어 징계를 받고 첫 번째 백의종군(白衣從軍)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전라도관찰사 이광(李洸)에게 발탁되어 전라도 조방장(助防將) · 선전관 등이 되었고, 1589년 정읍현감에 제수되었다. 이듬해 고사리진병마첨절제사(高沙里鎭兵馬僉節制使) · 만포진수군첨절제사(滿浦鎭水軍僉節制使)에 임명되기도 했으나, 대간들의 반대로 취소되었다. 47세가 되던 해에 전라좌도수군절도사가 되었다. 당시 대간들은 이순신의 경력을 문제 삼으면서 그의 전라좌수사 임명을 강하게 반대했다. 하지만 선조는 대간들의 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순신을 결국 전라좌수사로 임명했다. 그는 곧 일본과의 전쟁에 대비하여 좌수영(左水營 : 여수)을 근거지로 삼아 전선을 건조하고 군비를 확충하는 등의 일을 처리했다. 뿐만 아니라 군사들의 훈련 상황과 무장 상황 등을 확인하고 군량의 확보를 위하여 해도(海島)의 둔전(屯田) 설치를 조정에 요청했다. 1592년 음력 4월 13일 일본의 침입으로 임진왜란이 발발되었는데 일본의 대군이 침입해 왔다는 급보가 전라좌수영에 전달된 것은 음력 4월 15일이었다. 결국 음력 5월 4일 이순신 함대는 처음으로 출격했다. 음력 5월 7일 옥포해전을 시작으로 연전연승을 거듭했다. 이순신 함대의 활약으로 조선은 제해권을 장악할 수 있었다. 일본군은 수륙 병진 전략으로 가급적 짧은 시간에 조선을 장악하겠다는 계획에 실패했을 뿐만 아니라 수로를 통한 보급이 불가능해져서 전쟁의 양상이 크게 변하게 되었다. 그러나 1597년 일본의 계략과 이순신을 시기하던 국왕과 신료들의 모함으로 파직되었다. 이순신은 자신의 직위와 업무를 원균(元均)에게 인수인계하고 음력 2월 26일 한양으로 압송되어 음력 3월 4일 투옥되었다. 가혹한 문초 속에서 이순신을 사형에 처하라는 의견들이 많았지만 판중추부사 정탁(鄭琢)의 상소 등에 힘입어 특사되었다. 그리고 도원수 권율(權慄) 휘하에서 백의종군하도록 지시 받았다. 이것이 이순신의 두 번째 백의종군이다. 이순신에 이어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던 원균은 1597년 음력 7월 14일과 15일 칠천량(漆川梁)에서 일본군에게 참패하면서 조선수군을 궤멸 상태에 빠지게 했다. 대책을 마련하지 못하고 있던 조선 조정은 결국 병조판서 이항복(李恒福)의 의견에 따라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하게 되었다. 당시 이순신에게 주어진 전력은 군사 120인에 병선 12척 뿐이었다. 그렇지만 이순신은 이 전력만으로 음력 9월 16일 명량(鳴梁)에서 일본 수군을 대파하면서 조선의 제해권을 다시 확보하는 동시에 조선 수군을 재편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1598년(선조 31) 음력 11월 19일 이순신 함대는 퇴각하기 위해 집결한 500척의 일본 함대를 노량(露梁)에서 공격했다. 이순신의 지휘 아래 조선수군은 다시 한 번 큰 승리를 얻었다. 하지만 이순신은 음력 11월 19일 전투 중에 일본군의 유탄에 맞아 숨을 거뒀다. 이순신 1599년 음력 2월 11일 아산(牙山) 금성산(錦城山) 밑에 안장되었다. 1614년(광해군 6)에 현재 아산시 음봉면(陰峰面) 어라산(於羅山) 아래로 천장(遷葬)했다. 전사 후 우의정이 증직되었다. 1604년에는 선무공신(宣武功臣) 1등에 녹훈되었고, 풍덕부원군(豊德府院君)에 추봉되었다. 동시에 좌의정에 추증되었다. 1643년(인조 21) 충무(忠武)의 시호가 추증되었다. 1704년(숙종 30) 유생들의 발의로 아산에 현충사(顯忠祠)가 건립되었다. 1793년(정조 17) 음력 7월 1일 정조의 뜻에 따라 영의정(領議政)으로 추증되었다. 2년 뒤에는 정조의 명에 따라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가 윤행임(尹行恁)에 의해 편찬 · 간행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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